도이 다카코
도이 다카코(土井 たか子, 1928.11.30~2014.09.20)는 일본의 여성 인권 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소개[편집 | 원본 편집]
도이 다카코는 거대정당 첫 여성 당수, 첫 중의원 여성의장 등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역사적인 정치인 중 한명으로 꼽힌다. 1980년대 후반 일본사회당의 대표로 지내면서 도이 붐을 이끌며 사회당의 약진을 주도하였다. 그로 인해 마돈나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생전 취미는 노래방(가라오케)와 파칭코 게임이었다고 한다.
독신이자 비혼주의자였는데, 이에 대해 "나는 평화헌법과 결혼하였다"고 위트있게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생전에 선택적 부부별성제도 도입을 지지하였다. 그 이유로 "결혼을 하는 대부분의 여성이 성(姓)을 고치고 있는 현 상황은, 종전 이후 헌법이 새로 제정되고 민법의 개정으로 가부장 제도가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남성 혈통을 중시하는 '호주적 의식'이 뿌리깊은 것이다"라는 주장을 들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28년 효고현 고베시에서 태어났으며 도시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법학사 학위 수여 이후 동대학원에 진학하여 법학 석사 과정까지 밟았다.
50-60년대 사회주의자이자 헌법학자로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도 공해 관련 환경운동과 여성,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1969년 일본사회당 소속으로 효고 2구 중의원 의원에 첫 당선되었다. 그 뒤 남녀 고용 차별이나 대학에서 여성만이 가정학의 필수 이수 대상인 점, 부계혈통만을 인정하는 국적법 등을 집중적으로 질문하는 등 성차별법과 관련해 정부를 추궁하며 성평등을 위해 노력하였다.
1984년 다나카 스미코의 뒤를 이어 일본사회당의 부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85년 일본의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 비준을 이끌어냈으며 1986년에는 사회당 대표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는 미니정당을 제외한 거대정당 내에서의 일본 헌정 사상 첫 여성 당수 탄생이였다. 이을 계기로 도이 대표가 주축이 돼 여성 문화인 모임이 열리기도 했고, 그것은 도이 자신의 인기 향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회당이 선거에서 약진하며 지지율을 크게 높인 "도이 붐"이 시작되었다. 도이 붐은 현재까지도 일본의 대표적인 코트테일 현상(후광효과)으로 꼽힌다.
1989년 도쿄도의회 선거와 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 비판표를 얻고 대승을 이끌었다.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을 개선 1당으로 만들고 "산이 움직였다"라는 발언을 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참의원에서는 여당 과반이 무너졌다. 이후 참의원에서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중의원에서는 가이후 도시키가 총리로 지명되었고, 중의원 우선원칙에 따라 총리가 되지 못하였다. 만약 실제로 총리가 되었다면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는 것이였다.
이어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이제, 하나의 산이 다시 움직이지 않아서는 안됩니다"를 슬로건으로 하여 사회당은 크게 의석을 늘렸다. 당시 136석을 획득하였으며 53석이나 늘렸다. 자유민주당은 당시 20석이 감소하였었다. 그러나 집권에 이르지 못하고 야당내에서 사회당만 돌풍을 일으켜 의석을 얻은것에 대해 공동투쟁노선을 이루는 공명당, 민사당 등 타 야당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실제로 39회 총선에서 공명당은 9석 감소, 민사당은 12석 감소 등 오히려 피해를 입었다) 이어 평화주의 등 사회당의 기존 정책들이 시대 변화와 함께 맞지 않게 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고집한 일, 한편으로는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유권자의 실망을 초래했다. 실제로 1991년 걸프전을 앞두고 이라크를 방문, 사담 후세인 당시 이라크 대통령을 만나 반전주의를 설득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기도 했다.
결국 1991년 통일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이 대패하며 도이는 대표직을 사임하였다. 또한 공명당과 민사당이 거리를 두면서 연합정권 협의가 중단되었다. 1992년의 제1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사회당은 현의석 유지에 그치며 "도이 붐"은 종식되었다. 그이듬해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의석을 거의 반토막내는 대패를 거두었지만(70석을 획득하였으며 무려 66석이 감소되었다.)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일본신당 등 신당 붐으로 의석을 늘린 자민당 탈당파들과 연립하여 전후 최초 비자민당 총리 탄생에 가담했다. 또한 이로 인하여 도이 다카코는 1993년 8월 6일 일본에서 여성 최초로 중의원 의장이 되기도 하였다. 중의원 의장 재직 당시 의원 지명시 '~씨'를 붙이는 것을 관례화하였다.
이후 1996년 일본사회당이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을 때 대표로 재취임하였지만 2003년 총선에서 패하면서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2005년 총선에서 낙선하며 정계 은퇴하였다. 도이 붐으로 얻은 의석을 완전히 잃은 사회당은 그 후 분열, 소정당화의 길을 걷게 된다. 2006년 사회민주당에서는 도이 다카코에게 명예 당대표의 칭호를 수여한다. 정계 은퇴 이후에도 정계 복귀론이 수차례 거론되었는데, 실제로 2007년 참의원 선거 출마론이 돌기도 했었다. 그러나 2008년 차기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확고히 하였다.
이후로는 사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2010년 1월 말, 1990년 12월에 자신이 직접 설립하여 대표이사를 맡고 있던 '아시아인권기금'이 그 역할을 마쳤다고 판단하여 활동을 종료하였다. 2013년 10월에 사민당 신임 당수로 선출된 요시다 다다토모가 선출 직후 도이에게 면회를 신청했지만, "여위게 되어 왕년의 이미지와는 달라져 버렸다"는 이유로 거절당해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아베 신조 정권에 대한 위기감을 드러내는 등 정계에 메시지를 계속 전달했다.
2014년 9월 20일에 폐렴으로 효고현내의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별세 소식은 28일에 사민당 본부에 의해 공표되었으며 11월 25일 작별회가 열렸다.
2003년 도이 다카코의 뒤를 이어 사민당 총재를 맡았던 후쿠시마 미즈호 또한 도이가 발굴한 여성 정치인 중 한명이다. 미즈호는 도이의 사망 당시 "도이씨의 제안으로 1993년 헌법을 지키기 위해 참의원 입후보를 결심했다"면서 "그의 죽음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며 '정치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다" 고 애도를 표했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비록 한계는 뚜렷했으나 일본 최초로 여성이 거대정당 당수와 중의원 의장이 되는 등 일본 정치에 만연했던 유리천장을 타파했고, 여성 인권의 증진과 사회 복지의 확대에 힘썼다. 또한 평화헌법 수호와 인권 운동에 앞장서 이 두가지를 지켜내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현재도 많은 일본 여성, 진보 정치인들의 롤모델로 남아있다.
한국과의 관계[편집 | 원본 편집]
도이 다카코는 대표적인 친한파 의원으로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1973년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 전 대통령 구명운동과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전개했으며 2007년 광주세계여성평화포럼에도 참여하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어록[편집 | 원본 편집]
- "산이 움직였다" (사회당을 참의원 선거 제1개선정당으로 만든 뒤)
- "이제, 하나의 산이 다시 움직이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1990년 총선 슬로건)
- "안 되는건 안 되는거다!" (소비세 추진에 대항하며)
- "일본은 경제 거인일지 몰라도 인권에선 난쟁이일 뿐이다."
- (독신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나는 평화헌법과 결혼했다."
- "북한에 속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