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회당
일본사회당 日本社会党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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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 | Japan Socialist Party : JSP | |
약칭 | 사회(社会) | |
슬로건 | 激サイティング! 社会党 (격한 익사이팅! 사회당) | |
창당일 | 1945년 11월 2일 | |
해산일 | 1996년 1월 19일 | |
당사 위치(당시) | 일본 도쿄도 지요다 구 나가타초 | |
선행 조직 | 사회대중당 등 | |
후신 조직 | 사회민주당 | |
이념 |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호헌/반전주의 비무장 중립 | |
스펙트럼 | 좌익 | |
위원장(해산 당시) | 무라야마 도미이치 | |
부위원장(해산 당시) | 오카자키 토미코 | |
서기장(해산 당시) | 구보 와타루 | |
당색 | 남색 | |
중의원(해산 당시) | 70 / 511 | |
참의원(해산 당시) | 37 / 252 | |
당원 수(해산 당시) | 약 5만~10만여명 | |
소속 국제조직 | 사회주의 인터네셔널 |
일본사회당(일본어: 日本社会党 닛폰샤카이토우, 영어: Japan Socialist Party, 약자: JSPJava Server Page)은 1945년 창당한 일본에 존재했던 좌익 정당이다.
상세[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창당 이후 1947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어 1948년 5월까지 가타야마 데쓰를 주축으로 한 사회당 정권이 성립되기도 하였으나, 그 이후 1950년대의 좌우분열 후 재통합 그리고 55년 체제 등을 거치며 야당이 되어 자유민주당과 함께 일본의 1.5당 체제를 이루는 양대 주축이였다. 1955년부터 1993년까지 사회당은, 꾸준히 일본 자유민주당의 개헌선을 저지하며 자민당의 독주를 방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1993년 선거에서 몰락하기 시작하였으며 1994년에는 자유민주당과 연립하여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을 출범시키는 등 심각한 노선 혼선을 겪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지지층이 일본민주당 혹은 일본공산당으로 이탈하였으며 결국 1996년 쇄신을 이유로 해산하여 사회민주당이 되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출범 이후와 좌우 분열, 재통합[편집 | 원본 편집]
일본 사회당은 비공산당계열이던 합법 사회주의 세력이 단결하여 결성하였다. 1947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143석을 획득해 제1당으로 부상한다. 그 결과 민주당과 국민협동당과 연립하여 가타야마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히라노 리키조 농림성 장관이 공직에서 추방된 것을 둘러싸고 우파의 일부가 탈당하고, 당내의 좌파는 공공연하게 내각을 비판하는 등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949년 1월 23일의 제24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의석이 48석으로 격감해 여당에서 제2야당으로 추락했으며, 위원장이던 가타야마 데쓰까지 낙선하게 되었다.
또한 이념 차이로 인한 촉발된 좌우 양파의 대립은 심각하게 진행되었고, 1950년 1월 16일에는 좌·우파가 분열하게 된다. 이때는 75일 후인 4월 3일의 당대회에서 다시 통일할 수 있어 대립이 종료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곧 대일강화조약의 찬반을 둘러싸고 좌우 양파가 대립하기 시작해, 1951년 10월 24일에 다시 분열된다. 그러나 사회당 좌우 양파는 1955년 10월 13일에 열린 당대회에서 오랜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통일을 완수했다. 이후 1957년에는 당의 분열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도이 붐[편집 | 원본 편집]
이후 1960년대~1980년대 초반에는 자민당과 함께 1.5당 체제를 이루며 자민당의 독주와 개헌선을 저지하였다. 1986년에는 도이 다카코 위원장이 취임하였다. 이는 미니 정당을 제외한 헌정 사상 첫 여성 당수 탄생이였다. 이을 계기로 도이 대표가 주축이 돼 여성 문화인 모임이 열리기도 했고, 그것은 도이 자신의 인기 향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도이 붐"이 시작되었다. 도이 다카코는 1989년 도쿄 의회 의원 선거와 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 비판표를 얻고 대승을 이끌었다.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을 개선 1당으로 만들고 "산이 움직였다"라는 발언을 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참의원에서는 여당 과반이 무너졌다. 이후 참의원에서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중의원에서는 가이후 도시키가 총리로 지명되었고, 중의원 우선원칙에 따라 총리가 되지 못하였다. 만약 실제로 총리가 되었다면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는 것이였다.
이어 1990년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에서도 "이제, 하나의 산이 다시 움직이지 않아서는 안됩니다"를 슬로건으로 하여 사회당은 크게 의석을 늘렸다. 그러나 집권에 이르지 못하고 야당내에서 사회당만 돌풍을 일으켜 의석을 얻은것에 대해 공동투쟁노선을 이루는 타 야당의 반발을 부른다. 이어 평화주의 등 사회당의 기존 정책들이 시대 변화와 함께 맞지 않게 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고집한 일, 한편으로는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유권자의 실망을 초래했다. 결국 1991년 통일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이 대패하며 도이는 대표직을 사임하였다. 1992년의 제1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사회당은 현의석 유지에 그치며 "도이 붐"은 종식되었다. 그이듬해 1993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의석을 거의 반토막나는 대패를 거두었지만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일본신당등 신당 붐으로 의석을 늘린 자민당 탈당파들과 연립하여 전후 최초 비자민당 총리 탄생에 가담했다.
그러나 성립 후 무려 8개 정당이 연립한 한계로 인해 균열이 나오기 시작했고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의 비토 선언으로 인해 10개월만에 연립정권이 붕괴되었다.
무라야마 내각[편집 | 원본 편집]
1994년 연립정권에서 이탈한 사회당은 자유민주당, 신당 사키가케와 연립하여 자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수상으로 하는 무라야마 내각을 출범시킨다.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총리로 취임한 직후의 국회 연설에서 안보조약을 긍정하고, 비무장 중립정책의 폐기 등을 표명했다. 이것은 이제까지 지속된 당노선에서 180도 변화한 것으로,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당의 구심력이 떨어져, 분당이나 해산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어 1995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크게 패하면서, 결국 1996년 1월 11일에 무라야마 내각이 총사직하게 되었다. 이어 1월 19일에 당의 명칭을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하였다.
해산과 사회민주당으로의 계승[편집 | 원본 편집]
이후 1996년부터 중의원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함께 이용하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안팎의 사정도 달라져 1996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사민당 단독으로 의석을 획득하는 것은 힘들다고 예상되었기 때문에, 신당 사키가케와의 합병이나 신당을 창당해 합류하는 것 등의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간 나오토 등이 중심이 되어, 새 선거구에 의한 선거를 치르기 위해 실시된 중의원 해산 직전에 민주당을 결성하게 되었으며, 사민당은 민주당으로 참가하기로 했지만 곧 참가 의견을 철회하였다. 하지만 간사장이었던 사토 간쥬 등을 포함하여 반 이상의 국회의원이 사민당을 떠나 민주당 결성에 참가하게 되었다. 또한 일부 당내 좌파는 탈당하여 신사회당을 결성하였다. 결국 남아있던 당대표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선거를 앞두고 1996년 9월, 도이 다카코를 당수로 추대하고 10월 20일의 제41회 중의원 총선거에 임하게 되었다. 사민당을 지지하던 노동조합의 대부분은 민주당 지지로 돌아섰지만, 아직 지방조직의 상당수는 사민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결국 사회민주당은 선거전 일본사회당의 70석에서 15석으로 의석이 급감하게 되었다. 55년 체제 이후 제1야당의 자리를 고수하였던 일본사회당의 역사는 이로써 막을 내렸다.
정치 성향[편집 | 원본 편집]
주로 좌파의 노동농민당, 중간파인 일본노농당, 우파인 사회대중당 등이 결집하였으며, 우파와 중간파는 민주사회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좌파는 수정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일부였던 사회대중당 세력은 태평양 전쟁때 사회주의의 실현을 국가주의에 요구하며, 군사 독재에 협력한 강경파적인 색채가 강한 의원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미국에 비판적이었으며 신생국인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지지 기반[편집 | 원본 편집]
지역 기반[편집 | 원본 편집]
초기에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대도시와 그 근교지역을 지지 기반으로 하였으나 이후 자민당, 공명당의 표 잠식으로 완전한 지지기반으로 하는데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홋카이도, 도호쿠, 아이치, 오키나와 지역은 '텃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당세를 자랑했다.
연령 기반[편집 | 원본 편집]
주로 나이불문하고 노동자, 농민, 노동조합, 시민단체, 학생조직 등을 기반으로 하여 10대부터 60대 이상까지 다양한 연령적 지지를 받았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일본사회당이 분열되었다 다시 합친 1955년 이래 자유민주당의 독주와 개헌선을 적절히 방지하며 자유민주당과 함께 55년 체제의 한쪽 날개를 담당했지만, 결국 독자적으로는 정권을 취하지 못하고 쇠퇴했으며, 마지막에는 분열되어 상당수가 민주당으로 갈라졌다. ‘신선언’으로 노선을 전환하는 시도는 했지만, 결국 그에 기초한 정책과 운동방침은 ‘신선언’을 추진한 사람조차 제시하지 못했으므로, 독일 사회민주당처럼 노선전환을 통해 정권을 획득하지는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