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민주주의(民主主義, 영어: democracy)는 정치체제의 일종으로, 민중의 지배를 뜻한다.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이 다수결을 기반으로 이루어지지만, 반드시 모든 의사결정이 투표나 여론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시민의 정치의식도 성숙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무조건은 없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시작했다.
철학적 기반[편집 | 원본 편집]
공리주의[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지향한다. 다수의 의견이 채택되는 근본적인 이유지만, 소수의견에 대한 배려도 분명 필요하다. 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옳은 의견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의 폭압을 걱정하느라 다수의 의견을 배제하는 것도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민주적 의사결정은 다른 정치체제에 비해서 꽤 긴 시간을 소요하는 건,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여론을 형성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고구마 같은 정치체제다.
권력분립사상[편집 | 원본 편집]
대체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서로 견제하는 형태로 작동한다. 정치가 부패할수록 이런 견제는 형식적인 것으로 그칠 수 있다. 가령 입법부와 사법부는 서로 견제하지 않으며 오로지 행정부가 하는 일에만 사사건건 참견하는 식이다.
인권[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증진하는 방식을 지향한다. 자유와 평등은 인권에 직결되는 것이다. 어느 한쪽만 보장된다고 해서 건전한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는 법 앞의 평등을 내세우며, 법 아래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다.
시민 불복종[편집 | 원본 편집]
다른 정치체제에서는 시민 불복종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 불복종을 어느 정도 인정하며 시위나 집회, 파업 등의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심각하면 혁명이 터질 수도 있다. 이런 사태는 정치적 불안정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정치인은 평소에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되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정치인치고 시민 불복종이 달가울 리는 없다. 그러나 시민 불복종은 어디까지나 불합리한 정부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이지, 정부의 합리적인 정책에 타격을 입히기 위한 모략적인 수단은 아니다. 시민 불복종이 광범위하게 용인되는 때는 독재정부가 시민을 탄압하려고 할 때이다.
권력[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권력의 원천이 국민이라는 점이다.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었던 과거에 권력의 원천은 백성이 아니었다. 물론 백성은 나라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지만, 정책을 펼칠 때 백성의 의견은 별로 구하지 않았다. 물론 지나치게 백성을 무시하다보면, 민란이나 폭동은 물론이고 혁명이 발발할 수도 있어서 백성을 공기 취급하지는 않았다.
위임과 대의제[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 사회의 특징은 권력의 원천이 국민이지만, 국민이 직접 행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국민이 직접 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선거를 통해 권력을 당선자에게 위임해주고 당선자는 자신이 내세운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정상적인 형식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망가졌다는 표현이 나올 때도 있는데, 당선자가 부정한 방식으로 뽑히거나 당선자가 공약을 무용지물로 여겨서 마음대로 파기할 경우가 발생해도 유권자가 이에 대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을 때 주로 이런 말이 나오곤 한다. 그러나 부도덕한 사람이 권력자가 된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망가졌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 권력자를 얼마든지 끌어내릴 수단이 존재하는 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할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의 붕괴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권력자를 끌어내릴 수단이 부재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무너진 셈이다.
여론과 참여[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론을 완전히 무시하다간 크나큰 역풍에 부딪칠 수 있다. 여론의 저항이 있는 정책을 펼치려면, 여론을 설득하려고 노력하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지지율을 어느 정도 희생하는 수밖에 없다. 지지율이 붕괴되면 정권은 교체되기 십상이다. 지지율이 붕괴된 정권이 억지로 정권의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면 강력한 저항이 일어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또한 무조건은 아니다. 각 나라마다 정치문화가 다른 만큼, 지지율 붕괴를 헤쳐 나가는 방식도 각양각색이 된다.
민주주의 사회는 정기적으로 선거를 치러서 정권에 대한 평가를 한다. 대체로 현 정권이 만족스러우면, 다음 선거에서 현 정권에 유리한 결과가 나오지만, 2016년 미국의 사례처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설령 과반이어도 여당이 내세운 후보가 비호감이면 야당의 후보가 얼마든지 당선될 수도 있다.
언로[편집 | 원본 편집]
대부분의 국가에는 국민이 일일이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대한민국만 해도 국민이 약 5천만 명이 산다. 그런데 여론이란 국민의 표출된 의견이 수렴되는 형식으로 발현되므로 여론을 수렴할 수단이 필요하다. 그 수단을 언로라고 하는데, 오늘날 대표적인 언로는 바로 언론이다. 그러나 언론은 언론사라는 회사가 운영하는 것이므로 여론과 동떨어진 주장을 얼마든지 지속적으로 표출할 수도 있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국민 개개인이 인터넷 게시판에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가 급증했지만, 인터넷에 만연한 의견과 선거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어서 과연 인터넷에 주로 나오는 의견이 현실적인 대세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선동에 관한 취약성[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는 국민이 현명해야 제대로 굴러간다.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옛날에는 왕이 현명해야 나라가 평안했지만, 오늘날에는 국민이 현명해야 나라가 평안하다.
과거에 플라톤 등이 민주주의를 혐오한 것은 그가 겪은 경험, 즉 소크라테스 사형 선고가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편하게 권력을 획득하고 싶어 하는 권력자는 국민을 멍청하게 만들어서 중우정치의 수혜를 받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국가가 가난해지거나 큰 위기에 봉착하더라도 중우정치를 원하는 권력자에게는 상관없다.
그렇더라도 오늘날 대부분의 정치체제가 어떤 식으로든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의 총의가, 비록 당장은 아닐지라도 결국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리라는 공감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학습하는 존재니까.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다[편집 | 원본 편집]
처칠이 언급했듯이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줄 수 없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불만을 반드시 야기한다. 그러나 다른 정치체제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지 고려해볼 때, 민주주의는 완벽하지는 않을지언정 현존하는 정치체제 중 가장 진보되었으면서도 더 뛰어난 정치체제가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독재의 반대[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는 단 한 사람이나 극소수의 의견으로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게 아니다. 따라서 군사독재정부는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러나 왕이 있어도 민주주의는 의회 민주주의로 실현할 수 있다. 그럼 황제는?
소수의견 탄압[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는 대세적인 의견이 사회를 이끌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소수의견은 손쉽게 묵살되거나 심지어 탄압 당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일리 없는 말은 아니지만, 누구나 상대를 설득할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 묵살이나 탄압이라는 말은 과한 뉘앙스를 풍기는 게 사실이다. 소수의견이 탄압되거나 묵살된다는 주장이 나오려면 정부 차원에서 블랙리스트를 운용했거나 불법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부당한 처분을 내리도록 했을 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다.[1] 그리고 시민은 권한은 물론이거니와 그럴 힘도 없다는 점에서 시민이 소수의견에 귀를 안 기울일 수는 있어도 소수의견을 탄압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시민을 향해서 소수의견을 탄압하지 말라는 주장은 비판에 대항할 논리가 떨어졌거나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주로 나오는 반응이다.
방어적 민주주의[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자체를 보호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파괴할 의견마저도 존중할 수는 없다. 가령 국가를 전복하자는 음모나 민주주의적 질서를 거부한다는 의견까지 모두 존중할 수도 없거니와 존중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에서도 방어적 민주주의를 고려했다.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은 법에 명시되어 있다.
표현의 자유[편집 | 원본 편집]
표현의 자유는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다고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남용되어선 안 되는 개념이다. 표현의 자유를 남용하는 쪽에선 의도적으로 표현을 한 책임을 누락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게 당연하다. 표현이 무제한적으로 방종을 누릴 수 있다면 어째서 모욕죄가 있을 수 있을까? 누구나 표현을 할 수 있지만, 누구나 그 표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의견을 피력할 때에는 그 의견이 논리적이며 합리적인지, 사회에 받아들여질 만한 주장인지 잘 분별해야 한다. 의견에는 얼마든지 비판이 따를 수 있다. 그리고 그 비판도 표현의 자유에서 나오는 표현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내가 듣기 싫은 소리는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목소리로 치부해선 안 된다. 또한 표현의 자유는 헛소리를 보호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다.
기권할 자유[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는 참여를 통해 굴러가지만, 모든 시민이 모든 사안에 통달할 수는 없다. 또한 후보자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할 수도 없다. 물론 모든 걸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정치에 삶을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무효표를 던지는 것도 자유지만, 기권하는 것도 자유다. 애초에 권리를 포기하는 것 자체가 자유다. 자유를 스스로 포기했다고 해서 비난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투표권은 오랫동안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린 끝에 쟁취한 것이거니와 선거 결과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선거 결과를 바꿀 수 있다면 무슨 말이든 오가는 게 선거판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투표권이 권리인 동시에 의무인 경우도 있다. 정치 혐오가 판쳐봤자 거기에 편승하는 극단적인 정치인에게만 좋을 뿐이지, 유권자에게는 좋을 게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을 비난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 자유를 행사함으로 인해서 발생할 결과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다. 그 정도 예의조차 안 지킨다면 비난 받아야 한다. 그러니까 정치에 대해서 침묵하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투표권을 행사하자. 후보가 마음에 안 든다면, 마음에 드는 후보를 내세우려고 노력하자. 후보를 교체하려고 여론을 조성하는 것도 실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서 정치를 마구잡이로 비난하는 것은 비겁할뿐더러 정치를 발전시키지도 못한다. 강조하건대, 정치혐오는 아무것도 개선하지 못한다!
평등[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는 정부 형태가 다를지라도 한 사람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현명한 사람은 물론이고 설령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각자 행사할 수 있는 건 한 표씩이다. 다만 투표할 수 있는 연령이 안 되면 어떤 의견이 있어도 표를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 또한 나중에 모두 유권자가 되므로 이를 차별로 볼 수는 없다.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노령층의 정치적인 행위에 합리성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서 언젠가 투표연령 상한선이 그어질지도 모르지만, 대세적인 여론은 아니다. 그럼 젊은이들은 다 현명한가?
민주주의 이후?[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의 한계[편집 | 원본 편집]
브렉시트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는 최선의 결과를 보증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정치체제가 그렇듯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인한 결과는 모두가 오롯이 떠안아야 한다. 내가 반대한 정책이라도 나를 빗겨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감[편집 | 원본 편집]
분열된 여론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하다. 가령 왜 매일 정치인은 서로 싸우냐, 그만 싸우고 화합하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었던 적이 인류 역사상 존재하는가? 또한 정치인은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를 대변한다. 그렇게 안 하면 다음 선거에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인끼리의 다툼은 결국 국민끼리의 다툼이나 진배없다.
상대방이 피력한 나와는 다른 의견에 대한 거부감이 오늘날 상당하다. 이를 양분으로 하여 또다시 극좌와 극우가 무럭무럭 자라나 날뛰고 있다. 경제적인 위기가 혐오를 부추기기 쉬운 환경을 형성하고 있다. 혐오는 연령, 지역, 국가, 성별, 재산, 장애여부를 모두 포괄한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의지 없이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게 점점 문화적 유희로 적어도 인터넷상에서는 굳어지는 추세이며, 여기에 마땅히 제동을 걸 장치가 없다. 다수 정치인도 여기에 관해 편승할 생각은 있어도 제동을 걸 의지는 별달리 없다. 의견이 극단화될수록 쉽게 편승할 수 있고, 상대방을 쉽게 비난할 수 있고, 상대방을 쉽게 깎아내릴 수 있고, 자신의 정당성을 쉽게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배금주의와의 투쟁[편집 | 원본 편집]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선동이 사회를 휘몰아친다. 혹은 자신이 가진 알량한 영향력을 이용해서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하려는 시도가 상존한다.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듯이 지속적으로 오염된 정보에 노출시키면, 평범한 사람은 거기에 절대로 휘둘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왜곡되고 편향된 정보가 비합리적이고 지극히 감정적인, 특히 혐오를 조장하고 편승하며 여기에 부응하는 식으로 정치권이 화답할 경우, 이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위기인가?[편집 | 원본 편집]
민주주의는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다. 극좌와 극우가 시끄럽게 선동하는데도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질 못하고 있다. 이는 비단 대한민국만의 현실이 아니다! 오히려 미디어는 이를 부추기거나 여기에 편승하려고 한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민주주의 이후를 상상해야 한다. 제도적으로, 역사적으로 형성된 방어적 민주주의가 완벽하게 기능하리라고 여기면 안 된다. 민주주의의 붕괴는 자만하면서 나태하면서 태만하면서 시스템이나 제도에 대해 아무것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서 오염된 정보를 과신하면서 오직 영웅적인 정치인에게만 의존하려는 개개인의 총의가 모여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분명히 위기다.
민주주의에 관한 명언[편집 | 원본 편집]
“ |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 ” |
— 노무현 대통령, 제8회 노사모 총회 축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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