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종교(宗敎, 영어: religion)는 논리적으로 전부 설명할 수 없는 교리를 바탕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비세속적인 믿음의 체계이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그 입지가 나날이 줄어드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종교를 믿고 따른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때 종교는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참고로 신화를 읽고 재미있다고 느껴도 종교를 믿는 게 아니다.
종교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을 종교인이라고 부르며, 이 종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을 신자라고 부른다. 독선적인 종교인은 타 종교를 미개하거나 우상숭배나 한다고 치부하고, 설령 같은 종교 체계를 따르더라도 교리 해석이 다르면 이단이라고 몰아붙인다. 종교가 없으면 무교 또는 무종교, 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무신론인데, 대체로 무신론자는 종교가 없다.
먼 옛날에는 제정일치 사회가 흔했지만, 오늘날에는 제정일치 사회가 극히 드물뿐더러 그런 사회는 미개한 사회로 치부되기까지 한다. 종교인이 시민으로서 정치적인 견해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종교인이 교인을 데리고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현상이 흔한 사회가 적어도 건전한 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건전한 종교인은 반드시 교리보다 세속의 법률을 우선해야 한다.[1]
종교의 특성[편집 | 원본 편집]
교리[편집 | 원본 편집]
모든 종교는 교리를 가진다. 교리가 없다면 아직 종교가 아니거나 사이비 종교일 뿐이다.
교리는 문자 그대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시대가 바뀜에 따라 과거와는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교리 해석에 간극이 크면, 종파가 나뉘기도 한다.
포교 혹은 전도[편집 | 원본 편집]
모든 신자는 자신이 믿는 종교가 세를 넓히길 바란다. 세가 약해지길 바라는 신자가 있을까?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인 회합을 비롯한 독특한 행동양식[편집 | 원본 편집]
일정한 시각에 모두 같은 곳을 향해서 절을 하거나 일정한 날짜에 한곳에 모여서 기도를 올리는 행위는 교인이 아니면 안 할 행동이다. 궁금해서 한두 번 할 수도 있겠지만, 꾸준히 하진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꾸준히 하다보면 신자가 된다.
종교의 기능[편집 | 원본 편집]
종교는 신자한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신자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하므로 종교의 기능은 신자의 활동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긍정적 기능[편집 | 원본 편집]
심리적 안정감[편집 | 원본 편집]
종교는 세상에 관한 합리적인 설명이 부재할 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제공할 수 있다. 특히 이는 죽음과 관련한 묘사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종교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심하게끔 할 수도 있다.
사회적 안정[편집 | 원본 편집]
사후에라도 선행은 보상받고 악행은 심판받는다는 믿음을 통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법과 질서에 강한 의문이 제기될 때, 종교는 신을 비롯한 절대자의 의지나 도덕률을 내세워서 사회적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
불의에 대한 저항[편집 | 원본 편집]
종교는 기본적으로 선과 도덕을 지향하고 따라서 불의를 거부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서도 종교의 역할을 곳곳에 찾아볼 수 있다. 건실한 신자는 불의에 저항하려는 확고하면서도 뚜렷한 신념이 있다.
부정적 기능[편집 | 원본 편집]
사회적 혼란 조장[편집 | 원본 편집]
종교는 사회적 혼란을 조장하기도 한다. 공동체의 결속을 무너뜨리고 전쟁을 일으켜서 사회 구성원을 죽음에 빠트리기도 한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집을 날렸다든지, 지하철에 사린가스 테러를 벌이기도 한다. 집단 자살 사건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특히 종말에 대한 공포가 선동으로 나타날 때,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출될 수 있다.
입증된 사실에 대한 부정[편집 | 원본 편집]
어떤 종교는 헌혈이나 수혈 등을 죄악으로 여긴다. 수혈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보다 수혈로 교리에 어긋나는 죄를 짓는다는 인식이 강해서 수혈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는 수혈로 사람을 충분히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럴 수 있다. 수혈자가 이런 종교를 믿을 때에는 그 자신만 감당하면 되지만, 의사나 간호사가 이런 종교를 믿을 때에는 수술이 불가능해서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세속적인 문화 부정[편집 | 원본 편집]
법보다도 종교가 먼저일까?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 유럽에 난민으로 들어온 이슬람교도 중 적지 않은 수가 유럽의 문화보다도 자신들의 종교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경우가 잦다. 이로 인해 충돌과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난민 범죄는 경제적인 이유보다 종교적인 이유로 발생한다. 특정 종교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쪽으로 치달을 때, 해당 종교의 신자를 사회에서 배제하고 그 종교를 없애야 할 시점이 도래해도 이를 실천하기 극히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도 기독교인이 불상을 훼손하거나 단군상을 부숴버리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합리적인 생각을 오히려 비난하는 태도[편집 | 원본 편집]
종교에 지나치게 빠져든 사람 중에는 합리적인 내용의 말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하며 오히려 이를 부정하고 비난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주장의 근거를 사실에서 찾기보다 경전의 비유적 표현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일 때, 과거의 사회에서는 필요하고 통했던 말일지라도 오늘날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아니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과학에 대한 불신[편집 | 원본 편집]
자연에 관한 설명에서 종교적인 설명은 얼마나 유효한가? 자연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대부분의 자연현상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여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남아 있지만, 언젠가 그마저도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과학자들이 숱하게 많다. 우주의 시작이 빅뱅이론으로 설명되고, 인류의 출현이 진화론으로 설명되는 오늘날,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은 이런 설명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과학은 모든 걸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정수 중 하나인 인터넷은 잘만 이용하고 있다.
종교의 위상[편집 | 원본 편집]
오늘날 종교의 위상은 나날이 하락하는 추세이다. 과학의 발전을 비롯한 시민의식의 변화로 무신론자 내지 적어도 무종교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종교를 가졌다는 게 도덕적인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는 인식도 널리 퍼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옛날만 하지 않다. 식량은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있고, 의학의 발전으로 급사하는 경우도 극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지구나 태양계나 우주가 미래에 어떻게 끝장날지도 많이 알고 있다. 어떻게 신벌을 피할지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돈을 더 벌어먹을지 고민하는 데 시간을 들이는 게 대다수 사람이다.
그러나 종교는 당분간 소멸할 기미를 보이진 않고 있다. 사이비 종교는 아둔한 사람을 현혹하고 있고, 종교에 기대어 희망을 갈구하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한다. 종교인 중에는 보통 사람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 불우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고 나서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종교 목록[편집 | 원본 편집]
각주[편집 | 원본 편집]
- ↑ 가령 어떤 종교의 교리가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 또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모조리 몰살해야 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성립되어 있다고 치자. 교리가 형법보다 우선이라고 굳게 믿으면 이 종교인은 얼마든지 학살을 저지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