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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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일본어: (ひと) 히토) 또는 인간(人間, 영어: Human, 일본어: 人間(にんげん) 닝겐)은 지구에 나타난 가장 진보된 문명을 이룩한 지적 생명체이다. 또한 인간은 여전히 여러 가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존재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많은 학문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탐구하고 그 행동양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발전하고 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인류는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시간 동안 진화를 거쳐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다. 인류는 비록 인종과 민족이 각자 고유한 역사를 지녔을지라도 그 뿌리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 지점에서 모이게 된다.

인류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환경을 바꾸고 있다.

사회적 동물[편집 | 원본 편집]

문명[편집 | 원본 편집]

인류는 집단적으로 모여 살면서 문명을 이룩했다. 각 문명마다 독특한 특징과 문화를 창달했지만, 강을 끼고 있는 곳에서 문명이 발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을 구하기 쉬운 곳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물고기를 낚을 수도 있고, 주위와 교류하기도 쉬운 편이기 때문이다.

계급[편집 | 원본 편집]

인류는 오랫동안 신분제를 유지하고 살았다. 왕이나 귀족 같은 특권층이 있는가 하면, 노예 같은 천민도 있었다. 민주주의가 보급된 이후로 신분제는 타파되어가고 있지만, 아직 상징적으로 명예를 기리기 위해 작위가 있는 나라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신분제를 부정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신분제는 어떻게 타파할지 앞으로의 대한민국의 질서에 있어 관건이 될 것이다. 군대에서는 지휘체계를 위해 통용되는 계급이 있다.

도시[편집 | 원본 편집]

대부분의 사람은 도시에 산다. 도시는 여러 가지 인프라를 제공하며, 풍부한 노동공급으로 도시를 지탱한다. 도시에 살면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많은 갈등을 경험할 수도 있다.

도로[편집 | 원본 편집]

사람들은 이동하면서 산다. 한곳에만 머무르며 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람들이 지구의 여기저기에 살게 된 것도 오랫동안 꾸준히 여기저기로 이동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 멀리, 더 빨리 가려는 필요성은 도로를 정비하고 철도를 깔며 교통수단의 발달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가족[편집 | 원본 편집]

대부분의 사람은 가정에 속해서 산다. 오늘날 경제적인 이유로 혼자 사는 사람이 늘었지만, 과거의 농경 사회나 수렵 사회를 보더라도 가족으로 뭉쳐 사는 쪽이 많았다. 오늘날에도 집성촌 등은 간간이 볼 수 있다. 낯선 타인에 비하면 가족은 그보다 훨씬 신뢰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남보다도 못한 가족도 있기 마련이다. 좋은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이 악인이 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결혼[편집 | 원본 편집]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결혼을 통해 가족이 된다. 결혼식은 사람이 일생에서 겪을 수 있는 손에 꼽는 큰 이벤트 중 하나다. 간소하게 하고 싶어도 체면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일처제[편집 | 원본 편집]
일부다처제[편집 | 원본 편집]
다부일처제[편집 | 원본 편집]

이혼[편집 | 원본 편집]

상속[편집 | 원본 편집]

종교[편집 | 원본 편집]

오늘날 무신론자나 무종교인 사람들이 상당히 늘어났지만, 여전히 종교를 믿는 사람이 많이 있다. 종교는 사회에 무조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차별[편집 | 원본 편집]

인간은 잘 모르는 타인에 대해서 함부로 차별하기도 한다. 차별은 혐오와 맞물려서 벌어진다. 어떤 나라가 인류의 존속에 위협이 될 때, 그 나라에 속한 사람을 쉽게 미워하고 증오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차별의 근거는 다양하다. 인종, 민족, 나이, 성별, 재산, 학력, 신체적 특징은 물론이고 정치적 신념이나 심지어 자신들의 수치스런 과거를 부정하기 위해 피해자를 오히려 차별하고 멸시하는 경우가 있다.

정당한 혐오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정당하지 않은 혐오를 일삼는 자에 대한 혐오만 가능하리라.

평판[편집 | 원본 편집]

사람은 서로서로 평가하면서 산다.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엇갈린 평가를 받기 쉽다. 어딘가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사람이 다른 곳에서는 악당 취급을 받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평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새로운 사건이나 경험이 한 사람의 행적을 다르게 받아들여지도록 한다. 선각자의 예견은 살아 있을 때에는 조롱받다가 그가 죽고 나서야 제대로 재평가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래서 옳지 않아 보이는 것도 남들이 옳다고 우길 때, 여기에 저항하기 어렵다. 남들과 맞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평판을 형성하는 데에는 그 사람의 행적이 중요한 잣대가 된다. 그러나 이런 잣대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 경우를 볼 수도 있다. 연예인의 음주운전을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 공직자의 음주운전에는 관대한 경우를 볼 수 있다. 정치인에게 들이대야 하는 잣대가 훨씬 더 엄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인간 이외에 역사를 쌓아가는 생명체가 있을까? 개미이 서로 모종의 양식으로 소통하는 경우는 관찰할 수 있지만, 그들 자신의 역사를 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직까지는 인류만이 역사를 논하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려고 노력한다.[1]

정치적 동물[편집 | 원본 편집]

권력[편집 | 원본 편집]

수많은 인간이 권력을 추구한다. 권력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에서 권력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지만, 권력을 전횡해서 사익만을 추구하려는 의도에서 권력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다. 공공의 이익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은 사람이 권력을 차지할 경우 사회는 급속도로 망가지거나, 심각한 경우에는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다.

파벌[편집 | 원본 편집]

인간은 홀로 뭔가 의지를 관철하기보다는 견해를 공유하는 집단을 형성해서 의지를 관철하려는 경향이 있다. 견해차가 작은 집단과는 연대할 수도 있고, 견해차가 큰 집단과는 증오할 정도로 서로 반목하기도 한다. 파벌은 꼭 정치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편집 | 원본 편집]

인간은 오랫동안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에 휘말렸다. 원해서 치른 전쟁도 있지만, 원치 않는 전쟁도 분명히 있었다. 전쟁은 인류의 발전과 깊은 연관이 있다. 심지어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로 보는 관점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전쟁이 인류의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차가 다소 있다. 전쟁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분쟁은 궁극적으로 소멸해야 하지만, 군대를 없애는 문제는 세계정부라도 들어서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교섭[편집 | 원본 편집]

인간은 각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폭력만 동원해서 얻지는 않는다.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교섭도 있다. 오랫동안 통용된 외교 원칙 중 하나는, 원교근공이었다.

모략[편집 | 원본 편집]

인간은 상대방과의 대립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모략을 쓴다. 상대방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했다고 선동하거나 상대방이 한 발언을 확대해석 또는 축소해석하여 의도를 왜곡하기도 한다. 정제(整齊)된 단어를 써서 오해를 줄이려는 발언에 대해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질 단어를 쓴 것으로 와전하여 전하기도 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는 축소해석하거나 당시 상황을 호도하여 정당화하기도 하고, 상대방이 저지른 과오는 확대해석하거나 다른 선택지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굳이 그런 잘못을 일부러 저지른 것으로 잘못을 부풀리기도 한다.

복종[편집 | 원본 편집]

인간은 스스로 법을 비롯한 규칙을 만들고 거기에 따르거나 저항하기도 한다. 권위에도 따르는 편인데, 비판적 사고 없이 따르다가 함께 몰락하는 경우도 있다.[2]

경제적 동물[편집 | 원본 편집]

인간은 물질적인 기반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이런 필요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경제활동을 하도록 만든다.

노동[편집 | 원본 편집]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일한다. 적절한 여가도 필요하지만, 일거리가 없으면 생계가 곤란해진다. 인간이 수행하는 노동이 동물의 생존활동과 큰 차이가 있는데, 노동은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닐뿐더러 노동으로 얻은 것을 타인과 교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거대한 규모로 분업체계를 조직해서 수행할 수도 있다. 분업에 관심을 가진 유명한 경제학자로 애덤 스미스를 꼽을 수 있다.

시장[편집 | 원본 편집]

시장이 인류에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수수께끼이다. 다만 강력한 규제가 존재하거나 새로운 시장이 필요해져도 자생적으로 시장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이는 존 맥밀런이 쓴 <시장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잘 서술되어 있다.

시장에서는 재화와 서비스를 비롯한 상품과 정부가 공인한 화폐가 서로 교환된다.[3]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늘날 희소성 개념의 확산으로 그다지 신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추세다. 따지고 보면, 상품도 화폐도 매일 가치가 변동한다. 그런데 물가의 경직성에 무게를 둘 것인지 신축성에 무게를 둘 것인지에 따라 지향하는 경제정책이 달라질 수 있다.

축적[편집 | 원본 편집]

인류는 생산한 물품을 그때그때 몽땅 소모하지 않는다.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해서 여러 가지 물자를 비축해둔다. 단순히 식품을 저장해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본을 차곡차곡 축적해둔다. 이렇게 축적한 자본은 경제성장을 위한 토대가 된다.

이기심[편집 | 원본 편집]

여기서 이기심이란, 자신에게 제일 이득이 되는 방향을 추구한다는 것(self-interest)이지,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자기에게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는 각자의 이기심이 사회를 더 풍요롭게 한다고 봤지만, 게임이론이 등장한 이후로 이런 관념은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외부불경제는 인간의 탐욕을 마냥 규제 없이 풀어두기에는 위험하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철학적 동물[편집 | 원본 편집]

학문[편집 | 원본 편집]

인간은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다. 스스로에 관한 것도 그렇거니와, 우주에 관한 경외심도 대단하다. 오늘날의 학문은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논의를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했다. 그렇게 축적된 지식은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왜곡되거나 엉터리 지식을 올바른 지식으로 포장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한다. 또한 지식을 많이 축적했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롭거나 세상에 큰 도움이 된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곡학아세하여 권력이나 재물을 손쉽게 취하려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사람들이 지식을 악용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도탄에 빠진다. 학문이 진정 사람들에게 이로우려면 사람들이 보다 분별력을 갖춰야 한다.

지식[편집 | 원본 편집]

정보[편집 | 원본 편집]

패러다임[편집 | 원본 편집]

지혜[편집 | 원본 편집]

인간은 스스로를 성찰하는 재능을 가졌다. 누구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을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 성찰하는 습관은 지혜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첩경이다. 지혜는 지식의 축적으로만 형성되지 않는다. 지식과 지혜는 다소 다르다. 지식은 그저 정보의 축적에 지나지 않지만, 지혜는 지식에 없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이다.

문제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과시하고 싶은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주워들은 지식을 마치 대단한 것을 알게 된 것인양 온갖 설레발을 다 치는 것이 그러하다. 검증된 지식으로 하는 행동이라면 다행이지만, 엉터리 정보로 정부를 비난하고 선동하는데 앞장 서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이런 과시욕은 코로나19 사태 같은 위기에 세상에 악영향을 끼친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필요한 순간에만 쓰려고 하며, 평소에는 겸손한 자세로 있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니까 겸손한 사람이 지혜로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혜롭지 않은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의 경고나 조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조언이라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도 어느 정도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

소통[편집 | 원본 편집]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서로 생각하는 바를 터놓고 말할 수 있고, 비언어적 수단을 써서 의도를 암시적으로 내비칠 수도 있다.

기록[편집 | 원본 편집]

선동[편집 | 원본 편집]

선악[편집 | 원본 편집]

대부분의 인간은 무조건 선하지도, 무조건 악하지도 않다. 살다 보면 칭찬 받아 마땅한 착한 일을 할 때도 있고, 비난 받아 마땅한 악행을 저지를 때도 있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선한 사람, 선량한 사람 또는 선인(善人)으로 불리고,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른 사람은 악한 사람 또는 악인(惡人)으로 불린다. 특이하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선한 사람이 좋아하고 악한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진 않다. 참고로 쉽게 부화뇌동하는 사람은 악인이 되기 쉽다. 잘 모를 때에는 가만히 있어도 중간은 간다.

생물학적 동물[편집 | 원본 편집]

신체[편집 | 원본 편집]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지가 멀쩡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뇌를 비롯한 오장육부와 이를 덮을 피부, 신체를 지탱할 뼈는 있어야 한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의족의 활용성이 좋아졌고, 장기이식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를 대체했다는 소식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적응[편집 | 원본 편집]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추우면 따뜻한 옷을 입어 체온을 보존하려고 하며, 더우면 부채를 만들어 열을 식히려고 한다. 물이 없으면 땅을 파고, 위험이 있으면 힘을 모아 맞서려고 한다.

번식[편집 | 원본 편집]

섭식[편집 | 원본 편집]

의복[편집 | 원본 편집]

주거[편집 | 원본 편집]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은 정주생활을 한다. 정주생활에 필수는 단연코 집이다. 문화권마다 건축양식이 큰 차이를 보이지만, 집에서 먹고 잔다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

성장[편집 | 원본 편집]

사람은 의식하지 않아도 성장한다. 그러나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면 더 이상 육체적으로는 성장하지 않는다. 정신의 성장의 한계는 스스로가 결정한다.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면 정신의 성장은 거기서 멈춰버리고 만다.

노화[편집 | 원본 편집]

의학의 발달로 웬만한 질병은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평균 기대수명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판이하게 길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기대수명이 극도로 늘어날 때 사회가 어떻게 바뀔지 예측하기 어렵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아직 인간은 죽음을 완벽하게 회피할 수 없다. 그저 죽음의 순간을 계속 늦출 수 있을 뿐, 언젠가 누구나 죽게 된다. 케인스가 말했듯,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신화에서 사후세계를 이야기하게 만들었는데, 현실적으로 사후세계는 없을 가능성이 크다.[4]

인종[편집 | 원본 편집]

대체로 인종은 피부색으로 나눈다. 사람을 분류할수록 구성원은 계속 줄어든다.

외계인?[편집 | 원본 편집]

우주에는 인간만 산다고 아직 완벽하게 장담할 수 없다. 우주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대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은하, 항성, 행성이 있다. 그 행성 중에는 지구처럼 생명체가 거주하기에 적당한 곳도 있을지도 모른다. 관측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우주의 범위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UFO를 봤다는 증거는 대부분 조작되었거나 잘못 해석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인류가 우주에 등장한 것 자체가 극단적으로 낮은 확률을 뚫은 셈이다. 이 수수께끼에 가까운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인류원리라는 것이 제시되었다.

유희적 동물[편집 | 원본 편집]

쾌락[편집 | 원본 편집]

간혹 금욕적인 사람도 세상에는 있지만, 대체로 대부분의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고 쾌락을 좋아한다.

오락[편집 | 원본 편집]

예술[편집 | 원본 편집]

인간은 여러 가지 예술을 즐긴다. 미술, 음악, 문학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영화 같은 영상물을 만들어서 감상한다.

표현으로서의 인간[편집 | 원본 편집]

“아이고~ 인간아.”처럼 좋지 않은 의미로 ‘인간’이라는 단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 사람아, 그게 아니잖아.”라고 다그칠 때 ‘사람’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이름을 부르거나 당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인간’이나 ‘사람’을 쓸 때에는 좋은 의미로 부르지 않는 듯하다. ‘양반’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얼굴을 그린 그림 혹은 어떤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인 ‘화상’도 그렇다. 우리 자신이 인간인데 왜 이런 규칙이 자리 잡았을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인간적으로 그건 아니다.”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상대방의 가치관이 보편적인 상식과는 동떨어진 현상을 목도할 때 이런 말을 쓴다. “인간적으로 음주운전자는 공직자가 되어선 안 된다.”로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연설이나 역사적인 순간에는 ‘인류’나 ‘사람’은 ‘인간’보다는 자주 쓰이는 듯하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선거에 나왔을 때 슬로건도 ‘사람이 먼저다’였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one giant leap for mankind.
 
— Neil Armstrong, NASA

각주[편집 | 원본 편집]

  1. 여기서 역사란 흘러간 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가 없는 존재가 있을까? 그러나 과거를 고찰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으려는 존재는 인간 이외에 상상하기 어렵다.
  2. 이런 사례를 예로 들어 어떤 사람에 대해서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비판적 사고가 결여된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비판적 사고는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합리적이지 않은 비난에 왜 동조하지 않냐고 되묻는 자세가 비판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3.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때, 자국의 화폐는 쓸모없어진다. 이때 화폐개혁을 추진하거나 아예 기축통화를 시장에 통용하는 정책을 쓸 수도 있는데, 화폐개혁은 대체로 성공하기 어렵다. 다만 달러화 정책을 쓰면 금융정책을 쓸 수 없어져서 평소에 물가관리를 잘 하는 게 중앙은행의 큰 관심사가 된다.
  4. 사후세계가 있다면 천국지옥이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환생한다는 것일까? 사후세계의 존재는 의 존재와 직결되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