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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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철교(漢江鐵橋)는 한강의 교량 가운데 최초로 건설된 교량으로 경부선, 경인선(수도권전철 1호선 본선 계통포함)의 용산역과 노량진역을 잇는(주소상으로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 동작구 노량진동) 길이 1,110m의 철도 전용 교량이다. A, B, C, D선 총 4기의 교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99년 최초철도인 경인선의 제물포 - 노량진 개업 이후 잔여구간인 노량진 이북의 용산역과 당시의 서대문역 연장 목적으로 건설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수도권전철 1호선 본선 계통을 포함하여 사실상 한국철도의 가장 많은 열차가 통과하는 분주한 즉, 그야말로 한국철도의 핵심이자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간직한 역사적인 장소이며 한강철교를 건너는 순간 서울에 도착했음을 느낄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교량의 구성[편집 | 원본 편집]

한강철교는 A, B, C, D선의 4개 교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A선과 B선은 단선, C선과 D선은 복선이다.

각 교량의 통과하는 열차와 노선은 다음과 같다.

  • A선: 경인선 급행(동인천 - 용산), 경원선(용산삼각선 경유) 이용 임시 여객열차, 일부 화물열차(용산역 방향)가 이용.
  • B선: 경인선 급행(용산 - 동인천), 경원선(용산삼각선 경유) 이용 임시 여객열차, 일부 화물열차 (노량진역 방향)
  • C선: 경부고속선·호남고속선 KTX, 경부선·충북선·중앙선·경전선·호남선·광주선·전라선·장항선 방면 새마을호/ITX-새마을/무궁화호, 경부선 B급행(서울 - 천안(평일 한정)), 일부 화물열차
  • D선: 수도권전철 1호선 본선 계통 완행, 경부선 A급행 (청량리 - 천안·신창)

교량은 한강의 수심과 유역 관계상 전반적으로 남단(노량진측)은 트러스 구조, 북단(용산측)은 단순 강판형교(플레이트 거더)로 구성되어 있다[1]. 그 중에서 A, B선은 단순 싱글 와렌(warren) 트러스교[2]/단순 강상로판형교, C선과 D선은 3경간 연속 더블 프랫(Pratt) 복사재 트러스[3]/단순 강하로판형교로 되어 있는데 A선, B선, C선은 무도상[4] 교량, D선은 유도상 교량[5]이다.

B선은 중간에 굽어지는 곡선[6]이 있어 지나가는 열차는 무조건 서행[7]한다. 동인천 급행의 용산 - 노량진 소요시간은 이 때문에 D선으로 운행하는 완행보다 더 걸리며 간혹 완행이 급행을 추월하는 일도 생긴다.솔직히 말해서 D선으로 경인선 급행선로를 이엇어야 했다. A선과 B선을 완행선로로 잇고.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처음에 정부와 정식으로 교량 건설 계약을 맺은 사람은 미국인 제임스 모스였다. 그는 경인철도 부설권과 함께 교량 가설권도 획득하였다. 처음 계약에 따르면 보행자의 편의를 위하여 다리 한쪽이나 양쪽에 보도를 만들어야 하며, 선박의 운항을 위하여 개폐부를 만들거나 충분히 높게 가설하도록 규정하였다.

1897년 3월 29일 기공식을 갖고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일본은 부설권을 재취득하기 위하여 조선이 정치적으로 어지럽다는 거짓 소문을 미국에 흘렸고, 이로 인해 미국 투자가들이 자금을 회수하며 모스는 자금난을 겪게 되었다. 위협을 느낀 모스는 철도 부지의 토목 공사가 끝날 무렵 부설권을 일본에 넘겼으며 일본은 계약을 인수한 뒤 공사비가 많이 든다는 핑계로 이미 계약되어 사람이 걸어다닐 수 있는 보도 가설계약을 파기하였다. 이후에도 일본은 인력난으로 시일을 끌다가 1900년 7월에야 교량 1기(A선)가 완공되었다. 완공 당시 한강철교는 근대식 토목 공사로는 가장 규모가 컸다.

한강철교에는 교각이 9기가 있었는데, 모스가 그 가운데 제1, 2, 9호 교각을 시공했으나 그마저도 일본이 안전도 검사를 한 뒤 위험하다고 주장하며 다시 가설하였다. 모스가 만든 교량의 양 기둥으로 그대로 사용하였다. 시공할때 들어간 재료는 철강이 1,200톤, 벽돌이 120만 장, 시멘트가 5천 포, 석재가 5만 개 이상이며, 상부구조를 이루는 철재는 61미터짜리로 미국산이었다. 완성된 교량의 길이는 628.9m, 교각은 위쪽을 뾰족하게 하여 장방형으로 만들었는데 아래 둘레는 8.2m, 폭은 2.1m였고, 위쪽 둘레는 7.6m, 폭 1.8m이며, 교각의 수면 위 높이는 11.2미터였다. 교량의 상부구조는 하로 트러스/상로 판형교였는데 트러스 양식은 파커트러스[8]교로 추정된다.

경인선 및 한강철교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서울에서 인천까지 육로로 12시간, 배편으로 8시간이 걸렸으나 완공 뒤에는 1시간에서 2시간이 걸렸다. 철교는 그때까지 나루터였던 곳이었으며 일본인에 대한 반감으로 나룻배를 계속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원래 계약에 있었던 보도 설치는 1917년 한강 인도교(人道橋, 현 한강대교)가 건설되고 나서야 이행되었다.

1905년 경부선이 개업하고 열차운행횟수가 늘어나면서 1912년 A선의 상류 측에 동일한 양식·구조의 단선 교량을 하나 병설하면서 B선이 개통되었다. 이후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북단의 교대가 유실되어 열차운행이 불통[9]되었고 다시 복구되면서 이때 벽돌이 아닌 콘크리트로 바뀌었다.

그리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일제의 대륙침략전쟁 가속화와 여러 노선 개통으로 경성(서울)을 기점으로 하는 열차운행횟수가 늘어나면서 1944년 8월 1일 A선의 하류 측에 A·B선과 다른 트러스 양식의 복선 교량을 병설하여 C선이 개통되었다[10]. 이때부터 서울 - 영등포 구간을 공용하는 경부선과 경인선이 완전히 분리되면서 사실상 현재와 같은 경부1선과 경부2선의 2복선이 등장하게 되었다[11].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이승만 정부에서 다리를 모두 폭파했다(한강 인도교 폭파). 하지만 한강 인도교와는 달리 약간인 파손만 입었기 때문에 북한군 육군이 도섭판을 깔고 T-34 전차를 영등포로 직접 투입했다. 하지만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고 이후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확대되면서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는 중요한 목표물이 되는 바람에 반복적인 폭격으로 많은 부분이 완파되었다.

서울을 수복한 다음 1951년 미 육군 공병대인 미군 제62공병단에 의해 A선만 임시복구되었으며 열차가 임시로 통행하게 되었다. 이후 1952년 B선이 완전 복구되었는데 C선은 휴전협정 이후에도 한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1957년 7월에 완전 복구되어 재개통되면서 A,B선은 1969년 6월까지 방치되었다. 이후 6.25 전쟁 당시 투하한 것으로 추정되는 불발탄이 40여년 후 D선 교각 기초 공사 때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후 경제 발전으로 열차 운행횟수가 증가하고, 1965년 경인선의 복선화까지 가세하여 C선 하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C선 완전 복구 이후 방치된 A, B선도 1969년 6월에 완전히 복구하여 서울-영등포 구간의 2복선이 부활하였다. 이때 A선과 B선의 트러스를 현재의 와렌트러스 양식으로 전면교체하고, A선 트러스 일부는 완도대교 건설에, B선 트러스 일부는 수색철교 건설에 쓰였다. 이후 수색철교는 1990년대 안전조사 결과 붕괴 위험 판정으로 93년 통행금지, 1995년에 완전 철거되었으며 뒤이어 옆에 있던 수색교가 8차로로 확장되면서 흔적까지 완전히 없어졌다. 구 완도대교 역시 새로운 다리가 준공되면서 2012년 철거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경인선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경인선 2복선화가 시작되면서 이미 2복선화 구간이었던 용산-구로 구간의 3복선화가 착수되었다. 이를 위해 A선과 C선 사이 복선철교로 C선과 동일한 양식의 D선을 새로 건설하였으며 D선이 1994년 12월 개통되어 지금의 한강철교가 완성되었다. 다만 선로중심간격은 4.0m에서 4.3m로 확대되었는데 기록상에는 고속전철의 등장[12]을 대비한 것이라고 하지만 D선은 수도권전철 1호선 본선 계통이 사용하는 점을 감안할때 이유는 불분명한듯.

연혁[편집 | 원본 편집]

  • 1897년 3월 29일: 기공식
  • 1900년 7월 4일: A선 준공 (익일 개통)
  • 1912년 9월: B선 개통
  • 1944년 8월 1일: C선 개통
  • 1950년 6월 28일: 한국 전쟁으로 A·B·C선 폭파
  • 1957년 7월: C선 복구
  • 1969년 6월: A·B선 복구
  • 1994년 12월: D선 개통

여담[편집 | 원본 편집]

A, B선 남단과 북단의 기묘한 배선

전술했던 것처럼 A, B선은 남단이 트러스교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단이 단순 강판형교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남단과 북단이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다. 바로 북단의 경우 마치 복선이 아닌데 복선인듯한복선인데 복선이 아닌 너 형태를 취하고 있는 즉, 복선 교각에 단선 교량이 놓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교각부터 단선인 트러스 부분을 앞두고 B선이 곡선으로 휘어지는 선형이다. 이로 인해 전술한 것처럼 속도제한이 걸려 B선을 사용하는 경인선 급행 동인천 방면의 경우 같이 출발한 완행에 추월당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실 전술한 것처럼 한강철교 A선은 B선이 병설될때까지 단선이었을 뿐더러 B선이 유사한 양식으로 병설된 형태이기에 건설공사 측면에서도 북단의 복선에 가까운 형태는 등장할 이유가 없는 구성이다. 더군다나 기존의 단선교각을 복선으로 개수하는 것 자체부터 시공 난이도가 상당하기에 그냥 옆에 새로운 단선 교각을 세우는게 더 경제적. 왜 이런 배선이 나오게 되었는지는 관련 기록의 존재여부도 불분명하기에 현재로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13].

각주[편집 | 원본 편집]

  1. 후술할 내용이지만 한강 상류측에 인접한 한강대교도 남단이 타이드 아치교, 북단이 단순 강판형교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2. 후술할 내용이지만 현재의 트러스는 2대째 형태이다.
  3. 철도청 공식 용어로는 3경간 연속 변단면복사재 트러스교
  4. 나무침목궤도라고 하며 여기에 더해 거더(세로보) 위에 그냥 나무침목궤도만 얹혀진 형식을 바닥이 뚫린 형태라 하여 개상식(開床式, OPEN FLOOR), 그렇지 않고 다른 이유로 무도상 형태이되 바닥을 덮은 형태를 폐상식(閉床式, CLOSE FLOOR)으로 분류한다
  5. 다만 후술할 내용이지만 선로중심간격은 기존의 4.0m에서 4.3m로 확대되었다
  6. 후술할 내용이지만 A, B선의 북단은 복선교각에 단선교량을 조합한 형태와 관련이 있다.
  7. 특히 전통적인 무도상 강교에 궤도상의 주행레일 내측 혹은 외측에 탈선방지 레일이 존재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 구간의 속도제한은 엄격한 편이다.
  8. 경의선의 대동강철교와 지금은 버려진 압록강철교의 구 교량도 동일한 양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 이때 한강철교는 완전 침수는 면했으나 용산역에서 부산방향 기준 한강철교 북단까지 약간의 상구배가 있는 특성상 용산역 구내가 침수되었다.
  10. 이때 태평양전쟁의 악화로 다른 계획노선들이나 몇몇 노선들이 불요불급선으로 지정되고 심지어 전략노선이었던 경원선의 복선화마저 무산되었을 정도였다. 이때 한강철교 C선만큼은 온전히 공사가 진행되었을 정도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가를 시사하는 대목.
  11. 이때부터 현재의 대방역을 기준으로 경부1선(경부본선)과 경부2선의 위치가 경부1선이 대방역 하부를 통과하는 식의 꽈배기형으로 바뀌는 배선도 이때 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12. 공교롭게도 선로중심간격 4.3m는 신칸센철도 규격과 유사하다
  13. 다만 현 시점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용산삼각선과의 분기 문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군다나 용산삼각선의 분기가 한강철교 북단 초입에서 바로 시작되는 지점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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