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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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현(白光炫[1]: 1625년 4월 6일 ~1697년 3월 1일(음력 2월 9일)[2])은 조선 후기의 침의(鍼醫)이다. 본관은 임천이며 자는 미숙(微叔)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젊은 시절에 말에서 떨어져 다친 다음부터 침술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3]
1663년(현종 4년) 이경석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왔다.[3]
1670년(현종 11년)에 왕의 병이 회복된 것을 기념해 내의원 의관들에게 가자(加資)되었는데, 그 이름 중에 백광현이 보인다.[4]
1684년(숙종 10년)에 왕은 그를 강령[5] 현감(康翎縣監)에 임명했다가 이어 포천 현감(抱川縣監)으로 바꾸어 임명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그를 탄핵했지만 숙종은 윤허하지 않았다.[6] 이후에 금천[7] 현감(衿川 縣監)을 지냈다.[3]
1693년(숙종 19년)에는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8] 또한 가자되었다.[9]
1695년(숙종 21년) 숙종은 백광현을 각병(脚病)을 앓는 영돈녕부사 윤지완(尹趾完)에게 보내는데, 《실록》에는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해 많은 기효(奇效: 뛰어난 효험)가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神醫)라 일컬었다.”라고 쓰여있다.[10]
최종 관직은 숭록대부 지중추부사(崇祿大夫 知中樞府事)이다.[3]
1697년(숙종 23년) 음력 2월 9일, 송현(松峴)에서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2]
가족 관계[11][편집 | 원본 편집]
- 고조할아버지: 백기종(白起宗, 1480. 8. 22 ~ 1561. 6. 25)
- 증조할아버지: 백서룡 - 광흥창 주부 지냄, 판결사로 추증됨
- 할아버지: 백인호 - 한성부 좌윤으로 추증됨
- 아버지: 백철명(白哲明) - 첨지중추부사 지냄, 한성부 판윤으로 추증됨
- 어머니: 창녕 조씨(昌寧 曺氏) - 첨지중추부사 조덕건(曺德建)의 딸
- 형: 백광찬(白光璨, 1623. 6. 4 ~ 1697. 10. 18)
- 본인: 백광현
- 아내: 청주 한씨(淸州 韓氏)
- 아들: 백흥성(白興聲)
- 남동생: 백광순(白光珣, 1627. 4. 9 ~ 1680. 12. 4)
- 남동생: 백광환(白光瓛, 요절)
- 남동생: 백광원(白光瑗, 1632. 5. 11 ~ 1711. 10. 1)
- 남동생: 백광진(白光璡, 요절)
- 남동생: 백광선(白光瑄, 요절)
- 남동생: 백광린(白光璘, 1647. 9. 19 ~ 1721. 8. 20)
- 남동생: 백광근(白光瑾, 요절)
- 누이 3명
- 할아버지: 백인호 - 한성부 좌윤으로 추증됨
백광현을 다룬 작품[편집 | 원본 편집]
전기 자료[편집 | 원본 편집]
각주[편집 | 원본 편집]
- ↑ '炫'은 '玹'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 ↑ 2.0 2.1 《지사공 유사》
- ↑ 3.0 3.1 3.2 3.3 조현명, 《귀록집》 권14, 백 지사 묘표
- ↑ 《현종개수실록》 권23, 현종 11년(1670년) 8월 16일(경자) 2번째 기사
- ↑ 오늘날 황해남도 옹진군과 인천광역시 옹진군
- ↑ 《숙종실록》 권15, 숙종 10년(1684년) 5월 2일(정묘); 《승정원일기》 303책, 숙종 10년(1684년) 5월 5일(경오) 11번째 기사
- ↑ 오늘날 서울특별시 금천구
- ↑ 《승정원일기》 351책, 숙종 19년(1693년) 1월 2일(병오) 15번째 기사
- ↑ 《승정원일기》 351책, 숙종 19년(1693년) 2월 22일(병신) 8번째 기사
- ↑ 《숙종실록보궐정오》 권29, 숙종 21년(1695년) 12월 9일(정유)
〈묘표〉에도 비슷한 평가가 보인다. "近世所稱神醫者也。"(조현명, 《귀록집》 권14, 백 지사 묘표) - ↑ 조현명, 《귀록집》 권14, 백 지사 묘표를 근거로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