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징악
권선징악(勸善懲惡)은 착한 것을 권하고 악한 것을 벌한다는 뜻이다. 인과응보나 사필귀정과는 차이가 있다. 거꾸로 뒤집어서 권악징선이라는 단어도 인터넷상에서 간혹 볼 수 있지만, 이는 잘 쓰이지 않는다.
권선징악적인 이야기 구조[편집 | 원본 편집]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이야기 구조는 대체로 권선징악적이다. 즉, 착한 주인공이 나쁜 대적자를 무찌르거나 몰락케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 무리는 악당과의 대결에서 수세에 몰리기도 하고 심각한 피해를 입기도 한다. 그러나 지혜와 용기로 악당을 물리치거나 감화시켜서 정의를 구현하는 데 성공한다. 악당과의 대립에서 주인공은 마음이 흔들릴 때도 간혹 있지만, 신념을 끝끝내 지킨다. 늘 악당은 주인공보다 강하고 유리한 지점에 서 있다가 열세했던 주인공에게 패배한다.
물론 이야기 구조나 지나치게 단조로워질 수도 있으므로 약간의 변화를 불어넣기도 한다. 가령 주인공이 진정 선한지 의문을 불러일으키거나 악에 물들었던 주인공이 감화되어 선을 실행하는 식으로 말이다.
왜 사람들은 권선징악적인 이야기 구조를 좋아하는가?[편집 | 원본 편집]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편집 | 원본 편집]
권선징악적인 이야기 구조는 주인공에게 자기 자신을 감정이입하기에 적당하다. 사람들은 자신을 악당처럼 여기기보다는 주인공처럼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대중매체에서의 주인공은 과감히 도전한다. 현실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부조리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나만 아니면 돼! 그러다 나만 당하는 날이 온다. 주인공은 대체로 열세인 상황에서 상대방과 대적해야 하므로 온갖 역경과 마주하게 된다. 그 역경은 주인공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지 주목하게 하며, 극복하는 방법이 슬기로울수록, 역전하는 순간이 극적일수록 사람들은 뜨겁게 환호하게 된다.
정의구현이 선사하는 통쾌함[편집 | 원본 편집]
정의에 이르는 과정은 쓰디쓰지만, 정의로 얻는 결과는 달콤하기 그지없다. 현실에서는 자주 보기 힘든 게 정의구현의 순간이다. 더구나 현실에서는 정의에 이르는 과정이 너무나 느리다. 보통 사람은 한 권의 책을 하루 안에 다 읽을 수도 있다. 설령 그 책에 담긴 내용이 수십 년에 걸친 이야기를 압축한 것일지라도 하루 안에 감상에 젖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지난하기 짝이 없다. 법적 절차는 시민이 의지할 만한 수단 중 하나지만, 법원이 정의를 구현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현실의 가장 부조리한 점 중 하나는, 때때로 불의가 아주 오랫동안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헌법이 있어도 군사독재정권이 수십 년 동안 나라를 망칠 수 있고, 숱한 사람들이 멀고도 불확실한 정의보다도 눈앞의 이익을 바랄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매체에서의 정의는 상쾌할 정도로 독자나 시청자의 기대에 부응한다. 가해자는 몰락하고 피해자는 보상받는다. 현실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신에 대해 누구도 편들어 주는 사람을 찾기 힘들지만, 대중매체에서는 동료들이 주인공을 편들어준다. 물론 배신자도 생길 수야 있겠지만,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된 상태에서 보면 마치 자신을 옹호해주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때의 정의구현이 선사하는 통쾌함은 때때로 삶의 목적을 부여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에서도 꼭 실현하자.